2006. 10. 8.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경찬4)
본문 : 계 5:11-14
제목 : 새 노래를 노래하여 2. 

우리는 새 노래를 불러야 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새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몰라서 못 부르기도 하지만 그들은 새 노래를 부를 자격이 없기 때문에 부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 노래를 부를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고
새 노래가 무엇인지도 아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 노래를 부를 수 밖에 없는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새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여기 모였습니다. 

그 새 노래가 무엇인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그 새 노래는 옛 사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 사람이 된 성도들이 부르는 노래라고 했습니다.
그 새 노래는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진리를 알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을 때,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지 못했을 때 부르던 노래는 옛 노래였습니다.
인생의 허무나 노래하고 의미도 없이 소망도 없이 참된 기쁨도 없이 부르던 노래는 옛 노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그런 노래와는 전혀 다른 새 노래입니다.
소망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진짜 노래가 새 노래입니다.
이 새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옛 사람을 버리고 옛 생각도 버리고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 새 노래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가 보았던 그 천상에서의 새 노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1)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2)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3)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4)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지난주에 이 네 가지의 새 노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12절과 13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천상에서 불렀던 그 새 노래의 내용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새 노래를 불러야 하는 이유
새 노래의 내용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새 노래를 불러야 하는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새 노래를 불러라 새 노래를 불러야 한다라고 해도 왜 새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를 잘 모르면 제가 아무리 크게 외쳐도 여러분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새 노래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기 전에 새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 이유를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지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그리고 의지적인 것 이 세가지가 함께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즉 믿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그 믿음에 대한 뜨거운 마음과 그 믿음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력이 함께 할 때 우리의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 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성적으로 진리를 아는 일에만 평생을 다해서 노력을 합니다.
늘 성경을 읽고 성경공부를 하고 진리를 알려고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 믿음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나 그 믿음대로 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뜨거운 감정만을 추구하면서 삽니다.
가슴이 뜨거워 오고 눈물이 나야 하고 뭔가 느낌이 오게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은 하지만 막상 왜 그래야 하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고 그 뜨거운 가슴으로 뭔가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을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의 일을 하는데만 열심을 내고 진리가 무엇인지 잘 알려고 하지 않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 보지 못하고 무조건 충성만합니다.
결과야 충성을 하니까 좋은 일이겠지만 진리도 모르고 감사하는 뜨거운 마음도 없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도 온전한 신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균형 잡힌 신앙은 진리를 아는 일과 그 진리에 뜨거운 감사를 하는 마음과 그 진리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노래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실천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새 노래를 부르는가 옛 노래를 부르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참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노래는 우리의 신앙의 지식 즉 진리를 알게 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새 노래를 부르는가 옛 노래를 부르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에 관한 지식을 갖는 것 즉 진리를 알게 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교육시킬 때 귀가 따갑도록 반복해서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아주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게 하면 잊지를 않을 것입니다.

신명기 6:4-9절은 쉐마 본문이라고 합니다.
쉐마라는 말은 "들으라"라는 뜻입니다.
이 들으라는 말로 시작된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가르침을 쉐마본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리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 하여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중요한 교훈을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치라고 말씀을 합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마음과 힘과 성품을 다하여 사랑할 것을 한 두 번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꾸 자꾸 반복을 해서 노래를 불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집에 있든지 밖에 나가든지 누워서 있든지 일어나든지 언제나 가르쳐야 하고
손목에다가도 붙여 놓고 이마에다가도 붙여 놓고 문에다가도 붙여 놓고 언제나 그 말씀을 반복해서 교육을 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한두 번 말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자꾸 노래를 불러야 하고 언제나 생각을 해야 하고 죽을 때까지 반복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자꾸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자꾸 자꾸 변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 잔소리 안 하면 자꾸 반복해서 주의를 주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고 딴 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 노래를 불러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신앙에 대한 지식이 더 새로워져야 하고 그것을 늘 기억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옛날에 배운 율법에만 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새 노래로 그 진리를 배우고 자꾸 자꾸 반복해서 그 진리를 바르게 알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아주 좋은 무기입니다.
이 노래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기쁨을 느끼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찬양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찬양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나는 기쁨도 감정도 없이 기계적으로 노래만 불러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의 감정이 없는 기계적으로 부르는 노래는 찬양이 아닙니다.
우리의 뜨거운 마음이 함께 표현이 될 때 그것이 참된 찬양이 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그렇게 표현을 한다면 그것은 거짓찬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노래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큰 선물입니다.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노래를 부르며 울고 노래를 부르며 웃고 노래를 부르며 뜨거운 감사와 감격을 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억제 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그 뜨거운 마음 그 감사의 마음 그 은혜를 받음으로 느끼는 그 기쁨을 억제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메마른 감정을 더 뜨겁게 더 감격스럽게 표현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더 기쁘게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 우리는 이 노래를 부름으로 우리의 삶을 바르게 살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우리가 느끼는 대로 움직여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바르게 배우고 날마다 그 진리 앞에 뜨거운 감동을 하면 우리의 삶도 그렇게 나타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는 것이나 느끼는 감정이나 행동하는 것이 신앙인처럼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어 생활이 비성경적이고 감사하는 마음도 없고 행동하는 것도 바르게 살지 못하는 이름만 성도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하는 것이 성도답고 느끼는 감정이 늘 아름답고 행동하는 것이 참 성도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말만 나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하고 작은 감사거리가 생겨도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표현하고 움직이는 행동 하나라도 교회를 위해서 성도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시고 싶으면 이 새 노래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새 노래를 통하여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더 새로운 가슴으로 감사하며 날마다 더 새로운 마음으로 선한 일 좋은 일을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2.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본문 12절 말씀에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보고 들으니까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수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수가 만만 이요 천천이라고 했는데 만만이요 천천이라는 말은 셀 수 없이 많은 무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셀 수도 없는 수많은 무리들이 장로들과 생물들과 그 주의의 많은 천사들이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찬양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래는 어린양 즉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우리가 부를 새 노래의 주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양처럼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음이 우리가 부를 새 노래의 주제가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으로 끝이 나서는 안 됩니다.
그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즉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예수님께 어떤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노래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십자가는 힘없이 죽음을 당하는 비참한 죽음처럼 보이지만 그 죽음이 가져오는 의미는 엄청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아 십자가는 희생의 상징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저런 희생정신을 발휘하여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희생정신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할 때 그런 희생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단순히 그런 희생정신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 십자가의 의미는 희생정신같은 그런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인류를 죄에서 구언시키는 위대한 능력의 십자가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되는 위대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능력이 우리가 부를 새 노래의 주제가 되어야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12절에 뭐라고 노래했습니까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했습니다.

1)십자가에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힘과 능력입니까 
병을 고칠 능력입니까 부자가 되게 하고 성공하게 하는 능력입니까
그런 능력은 능력도 아닙니다.

사탄의 종이 단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죽고 멸망할 허무한 생명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원히 지옥에서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의로운 사람이 되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율법을 다 지켜도 금식을 하고 고행을 하고 엄청난 노력을 해도, 선을 많이 행하여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할 수 없는 일을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단번에 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른 새 노래는 나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선하고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바르게 살고 그런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보혈의 능력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 중한 피로다....

2)십자가에는 부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시킬 수 있는 충만함이 있습니다.
부족하거나 모자람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에게 다 나누어줄 수 있는 부요함이 있습니다. 

만약에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어떤 제한이 있어서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하면 피가 터지도록 경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1일날 서울시에서 7급 과 9급 공무원 932명을 뽑는데 전국에서 15만 명이 몰려와서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경쟁률이 162대 1이었다고 합니다.
162명을 물리쳐야 합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아 162명 정도야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내 뒤에 14만 9천명정도가 서 있어야 내가 합격을 한다는 것이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천국에 가는 것이 이런 공채와 같다면 경쟁률이 서울시 공무원과 비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깟 세상에 잠깐하는 공무원도 그 정도라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왕 노릇 하는 천국입시야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감사하기는 천국에는 경쟁이 필요없습니다.
십자가는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갈 수 있는 부가 넉넉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3)십자가에는 지혜가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아무리 무지한 사람이라고 해도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백성이 되는 지혜가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해도 십자가의 지혜를 알지 못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미련한 것이라고 비웃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고전1:18-19)라고 했습니다.

4)십자가의 어린양은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비록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지만 너무나 존귀하신 분이시고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분이시라는 것이 우리가 부를 새 노래의 주제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만 높여 드리고 우리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우리 주님께만 찬송을 드리는 것이 너무나 합당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세세토록 영원토록 하나님께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13,14절)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두 시간에 걸쳐서 새 노래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이 새 노래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 생명으로 거듭난 우리가 불러야 할 이 새 노래의 주제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 노래의 주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되시는 예수님이시며 우리 주님 지신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늘 새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새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새 노래를 부름으로 진리의 말씀을 날마다 새롭게 익히시기 바랍니다.
새 노래를 부르심으로 더 새롭고 뜨거운 가슴으로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새 노래를 부르심으로 더 좋은 일 선한 일들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