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1. 26.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경찬10)
본문 : 계 19:1-8
제목 : 할렐루야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말 즉 어떤 언어를 쓰는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서 양반이 되기도 하고 상놈이 되기도 하고, 교양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무식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도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중요한 말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말을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말을 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 상처를 받을까 이런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말은 마음에 있는 대로 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나 간사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화가 나면 자식이고 뭐고 상관없이 막 욕을 하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까지 서슴치 않고 했습니다.
남이야 어떻게 생각을 하든지 말든지 남이야 상처를 받든지 말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면 그냥 다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예 마음에 상처가 깊이 파이게 일부러 더 험하게 말을 했습니다.

요즘도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실컷 좋은 일 많이 하고 말 한 두 마디 아무렇게나 하는 바람에 그 공이 날아가 버리고 나쁜 사람이라고 취급을 당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정직한 사람이야 나는 거짓말을 할 줄 몰라 나는 마음에 없는 말을 안 해 그래서 솔직히 말하는데 너는 나쁜 놈이야..." 
그렇게 좋은 말 많이 놔두고 솔직하게 한다는 말이 너는 나쁜 놈이냐 너는 못생겼어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친구가 없고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면 여러분의 언어생활을 다시 한번 점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하고 살았는가를 한번 점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부정적이고 흉을 보고 비판하고 이런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좋다고 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다고 아예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주변 사람을 참 피곤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우하고는 살아도 곰하고는 못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옆에 있는 사람이 답답합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것 같고 꼭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고 싫어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입만 열면 좋은 말만 하십시오
좋은 말이면 많이 하십시오 
괜찮아 잘 될 거야, 좋아 좋아 아주 좋아, 잘했어 정말 잘했어, 고마워 정말 고마워, 짱이야 왕짱이야, 대단해 정말 대단해, 그래 그래 바로 그거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말을 어떻게 하는가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말을 많이 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정도와 색깔을 조금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많이 고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의 고백을 많이 합니다.
입만 벌리면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시옵소서를 많이 합니다.
나름대로 다 뜻이 있고 좋은 말들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많이 사용해야 할 귀한 말 한마디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 말은 설교제목과 같이 "할렐루야"라는 말입니다.

할렐루야라는 말이 이상한 사이비 집단의 기도원에서도 기도원 이름으로 쓰고 있고 또 특별한 교단에서 잘 쓰는 말이 되었고 때로는 의미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이 말을 쓰는 사람들 때문에 인식이 좀 좋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보면 참으로 귀한 말이며 우리가 늘 사용해야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살펴보시고 이 말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핵심어가 되기를 바랍니다.


1.할렐루야라는 말의 뜻
"할렐루야"라는 말은 원래 히브리어를 그대로 음역해서 사용한 말입니다.
이 말은 "할랄'이라는 동사와 "야"라는 명사가 합해져서 된 단어입니다.
"할랄"이라는 말은 "찬양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야"라는 말은 우리 하나님의 성호인 "여호와"의 준말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라 라는 뜻의 말입니다.

할렐루야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24번, 신약성경에 4번 나옵니다.
구약성경에는 시편에만 이 단어가 있고 신약성경에는 오늘 본문 즉 요한계시록 19장에만 4번이 다 기록되어 있는 특별한 단어입니다.

원래 할렐루야의 "할랄"이라는 말은 꼭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때로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칭찬할 때도 이 할랄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자랑하고 뽐내다, 미치고 어리석게 되다, 빛나다 비취다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사탄을 찬양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할랄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을 찬양한다라는 말로 사용하는 것이 별로 탐탁하지 않은 단어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라는 말로 쓰기에는 좀 세속적이고 점잖지 못한 저속한 언어로 여겨지는 단어라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사탄의 머리를 멸하신다"라는 표현을 "하나님께서 사탄의 대갈통을 까 부순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나 비슷한 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머리를 멸하신다라고 하면 좀 점잖은 표현으로 들리지만 실감은 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탄의 대갈통을 까 부순다라고 하면 표현은 좀 점잖지 못하고 경망스럽지만 느낌은 강하게 와 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을 할렐루야라고 했을 때 그 표현은 좀 점잖지 못하지만 그 느낌은 가슴에 와 닿는 실제적인 그런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점잖지 못한 할랄이라는 단어에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서 할렐루야로 사용한 사람은 다윗왕이었습니다.
시편 146편부터 150편까지는 다윗의 시인데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있는 특별한 시편입니다.
물론 그 앞의 시편에서도 다윗왕이 이 할렐루야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다윗왕이 이 말을 사용하기 전에는 "바락"이나 "야다"같은 점잖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왕이 왜 이런 말을 사용했을까요 
왜 점잖은 말을 두고 경박스러운 이 할랄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할렐루야라는 말로 사용을 했을까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최혁목사님 우리 와이즈맨 예배학교의 주 강사님이신데 이 분이 음악과 신학을 같이 공부하신 분이시고 특별히 예배에 있어서 찬양을 많이 연구하신 분이십니다.
이 분의 책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라는 책이 있는데 우리 사립문고에 몇권 두겠습니다 한번씩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책에 보면 다윗이 할랄을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할렐루야라는 말로 쓴 배경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다 말씀 드릴 수 없고 요약을 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있어서 열정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처음 안 것이 다윗이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왕 이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기는 했지만 외식적으로 형식적으로만 찬양을 했고 머리 속으로만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왕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더 외형적이고 더 적극적이고 더 감정적이고 춤을 추고 악기를 동원하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할렐루야라는 단어는 단순히 하나님을 찬양합시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되 열심히 최선을 다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악기를 다 동원하고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노래의 기법은 다 동원을 하고 입으로만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 온 몸을 다 드려서 박수를 치고 춤을 추고 흥에 겨워하면서 최고의 표현으로 최고의 열정으로 세상이 떠나 갈듯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찬양은 다윗왕 이전의 사람들처럼 아주 점잖게 조용하게 찬양을 하는 것이 고상한 것이고 전통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할렐루야라는 말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바르게 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찬송이 그렇게 소극적이고 무성의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생애에 제일 기뻤던 날이 언제입니까
그 날의 감격보다 그 날의 기쁨보다 더 기쁘고 더 감격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서울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한 그 날보다 더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내가 산 로또복권이 1등에 당첨이 되던 그 순간보다 더 기뻐 날뛰어야 합니다.
우리 축구가 강적 이태리나 스페인을 이기고 4강에 들어가던 그 날 보다 아니 우승을 하는 그 날보다 더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일제 36년 해방이 되던 그 날의 기쁨보다 더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할렐루야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할렐루야의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할렐루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
사도요한이 신약에 와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할렐루야를 왜 본문에만 이렇게 집중적으로 기록을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직접 본 그가 지금 최후의 승리를 노래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는 모습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고통당하는 모습만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할렐루야라는 말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천국에 가서 우리의 미래의 모습들을 미리 보았습니다.
최후의 승리의 모습을 이미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탄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믿음을 지키고 최후의 승리를 하고 주님 앞에서 찬양을 부르는 그 성도들과 그 천사들의 모습은 그냥 보통의 찬송이 아니라 할렐루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광경이 열정적이고 적극적이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런 모습인지 상상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최후에는 다 그렇게 좋은 곳에서 그렇게 기쁘게 춤을 추면서 노래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좋은 날을 미리 알고, 믿고, 미리 즐거워하면서, 미리 찬송과 감사를 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을 할렐루야로 찬송해야 할 이유들을 미리 보고 본문에 이렇게 기록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 말씀에 "...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들에서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 말씀입니다.
날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보통으로 하는 찬송이 아니라 할렐루야로 찬송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할렐루야를 보통의 말로 씁니다
어떤 때는 너무 아무렇게나 쓰기 때문에 좀 식상할 때도 있습니다.

부흥회를 인도하는 부흥사 목사님들이 이 할렐루야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아무 때나 이 할렐루야를 쓰기 때문에 듣기가 거북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돈을 많이 벌게 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려 주셨습니다. 하알렐루야!

물론 그런 사소한 것들로도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할렐루야라는 말을 쓰려면 날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 감격하면서 이 말을 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감격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그 기쁨을 최고의 감격으로 표현을 하면서 찬양을 드릴 때 할렐루야로 찬양을 하라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심판을 참되고 의롭고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2-3절 말씀에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번째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도 항상 승리자와 실패자가 있습니다.
승리자는 감사하고 기뻐하지만 실패자는 늘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세상이 불공정하고 편파적이라고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하신 후에도 구원을 받지 못한 패배자들은 원망을 하거나 불평을 할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 앞에 아무도 나서서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공평하고 너무나 의롭기 때문에 너무나 엄정하시기 대문에 감히 누가 나서서 왜 이렇게 하셨냐느니 감히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승리자인 우리 편에서 보면 두 말 할 것없이 참 잘하신 일입니다.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우리 인생들의 의의 기준을 믿음으로 정해버리셨기 때문에 그 기준대로 심판하시는데 믿음을 가졌던 우리는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3절 말씀에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라는 말씀은 심판을 받아 멸망을 한 이 세상이 타는 연기가 영원토록 올라갈 것이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그 심판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재심이 있어서 심판이 번복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최후의 심판 단 한번으로 영원한 운명이 결정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실패자들에게는 영원한 절망이지만 우리 성공자들에게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다 세상에 한두 번 성공하는 것도 이렇게 기쁜데
그것도 그 성공이라는 것이 언제 슬픔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것임에도 이렇게 좋은데 하물며 영원한 승리의 기쁨이야 말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3)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 말씀에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지만 육신적으로는 사탄이 지배를 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그 나라가 되면 모든 것이 완벽하고 너무나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모든 사람이 서로 평화를 누리면서 함께 사는 행복한 세상 그 나라가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헨델은 독일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입니다.
그가 세속적인 오페라에 관심을 가지고 작곡을 했지만 일은 꼬이고 흥행은 실패하여서 파산하였고 병까지 얻어서 눕게 되었습니다. 
그 때 우연히 읽은 오페라 대본에 "그가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고..."라고 하는 예수님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자기만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줄 알았는데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버린 바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가사에 맞추어 오라트리오 "메시야"를 작곡했습니다.
그 중에 유명한 합창곡이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할렐루야"입니다.
그는 이 곡을 작곡하면서 은혜에 감격해서 한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작곡을 했다고 합니다.

드디어 곡이 완성이 되고 처음 연주를 하는데 영국의 국왕 죠지 2세도 참석을 했습니다.
앞자리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있던 왕은 "할렐루야" 합창이 시작되자 왕관을 벗어서 옆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서 "할렐루야" 합창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할렐루야를 합창할 때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전능의 주가 다스리신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할렐루야"라는 말은 이렇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말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이지만 보통으로 찬양하라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기뻐하며 온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참되고 의롭고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