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0. 2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경찬7)
본문 : 계 14:1-5
제목 : 십 사만 사천인의 노래 3 

가끔 가수들이 무대에서 애절하게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저 사람이 정말 저런 감정을 가지고 그런 삶을 살면서 노래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가끔은 큰 교회에서 많은 성가대원들이 찬양을 하는 것을 보면서 저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일까 부끄러운 삶을 살면서 저기 서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습니다.

사실 무대의 가수들이 대부분 노래를 그렇게 부를 뿐이지 정말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을 부르기는 하지만 삶은 늘 자랑스럽지만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요한이 본 시온산에서 노래를 부르는 십 사만 사천 인들은 하나같이 깨끗하고 흠이 없는 정결한 사람들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도 참 부럽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도 정말 우렁차고 힘이 있고 그러면서도 정말 아름답지만 그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들의 모습도 너무너무 좋더라는 것입니다.

시온산에 주님과 함께 서 있는 십 사만 사천인의 노래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을 통해서 그들이 누구인가를 살펴보았고, 또 그들이 부른 노래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십 사만 사천인 그들은 장래의 우리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십 사만 사천 인은 문자 그대로 사람의 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수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몇 명인지 알 수 없는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어떤 제한된 수가 있고 중요한 것은 그 제한된 수에 우리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몸에는 인이나 사인같은 하나님의 특별한 표시가 되어 있었고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을 하면서 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많은 물소리와 같았고 뇌성과 같았고 그러면서도 거문고 타는 소리처럼 아름다운 소리였다고 했습니다. 
크고 우렁차고 그러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4절과 5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그 십 사만 사천 인의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들의 모습이 장래의 우리의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에 미리 살펴보고 그런 모습이 되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1.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본문 4절 말씀 중에 "...사람 가운데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소개하면서 중간에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신앙의 정절을 지켰고 주님을 항상 따랐고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자라는 것을 말하면서 그들은 구속을 받은 사람이고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속함을 받았다는 말은 죄의 값을 다 치루고 죄에서 구원함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 죄값을 대신 지불해주셔서 의로운 사람이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라는 말은 하나님께 바쳐진 구별된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온산에서 천상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성도들은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정결한 모습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노력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시고 구속하시고 첫 열매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 바른 삶을 살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먼저 우리가 왜 이렇게 바른 사람을 살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가 잘나서 우리의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금 출세를 했다거나 조금 선한 일을 한 후에는 자신의 공로만 내세우고 그렇게 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의 사람들도 좀 출세를 하면 자기를 낳아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님은 날 낳아만 주시고 아무 것도 해 주신 것이 없다고 자기가 이렇게 출세한 것은 순전히 자기의 노력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을 해 보면 자기를 낳아만 주신 것 그것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우리를 낳아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저 티끌에 불과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주시지 않으셨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해 주시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멸망받을 존재일 뿐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주셨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아무리 죽을 각오로 노력을 한다고 해도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들입니다.
본문 4절 말씀 중에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을 지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성적으로 깨끗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혹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말씀도 상징적으로 사용을 했다고 봅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영적인 간음으로 여기시는 우상숭배나 배교를 하지 않고 늘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백성간의 관계를 흔히 남녀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순결한 처녀로, 신약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왕 19:21;사 37:22;렘 18:13;암 5:2;고후 11:2). 

사도요한이 시온산에 주님과 함께 있는 십 사만 사천 인들의 모습을 보니 신앙의 정절을 지켜서 우상숭배나 배교를 하지 않은 정결한 신부와 같더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모습을 보면 과연 우리가 이 모습 그대로 시온산에 설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대속해 주셨으니까 그 곳에 가는 일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참 부끄럽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교회도 다니다가 말다가 한 사람도 많고 평생을 교회에 다닌 사람도 사소한 것 때문에 말씀을 어기고 주님을 따르지 않고 세상을 따른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면 부끄러움은 좀 면할 것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그를 위해서 훈련을 받았지만 틈만 있으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함께 사는 부부라고 해도 서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희생도 없이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친구나 가까운 가족들까지 나를 싫어한다면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들과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유지하고 지금의 이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 깨끗하고 정결한 모습으로 시온산에 서기 위해서는 큰 관문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인이 되는 것이고 하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노인이 되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지금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죽음을 맞이해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믿음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시원찮게 예수님을 믿다가 시원찮게 신앙생활을 하다가는 어려움이 닥칠 때 노인이 되어서 기력이 상실될 때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 믿음을 부인하고 본래 죄인의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생각이 굳어져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을 고집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노인이 되기 전에 신앙생활의 많은 훈련을 받은 사람은 바른 신앙을 배우고 주님과 사랑으로 교제하던 사람은 변함이 없이 그것을 늘 유지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진리도 알지 못하고 신앙의 훈련도 받지 못하고 주님과 사랑으로 교제해 보지도 못한 사람은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에 큰일입니다.

사상이 굳어지는 노인이 되기 전에 많은 것들을 배우고 더 많은 훈련들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을 사는 것도 신식 노래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우고 새로운 지식들도 더 많이 습득을 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철저하게 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몸에 배어야 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 예배를 바로 드리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충성을 하는 것 헌금생활을 하는 것 하나 하나를 철저하게 지켜서 훈련이 잘되고 기초가 튼튼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쿡 찌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말이 나오고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요한이 본 시온산의 십 사만 사천인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이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정절을 지킨 청순한 모습 정결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모습으로 거기 서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평소에 훈련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예배도 잘 드리시기 바랍니다.
찬송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헌금생활도 성의껏 하시기 바랍니다.
충성도 많이 하시고 봉사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흔들림이 없이 변함이 없이 늘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어디든지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4절 말씀 중에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라고 했습니다.
시온산에 서 있는 그 십 사만 사천 인은 어린양이신 우리 주님께서 인도하시면 그 길이 어떤 길이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계시는 시온산에 서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도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주님 가신 길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런 길을 가라고 해도 따라갈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정절을 지켜서 다른 길로 가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것이라면 주님을 따라 어디든지 가려고 하는 신앙은 적극적인 신앙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에는 서로 따라 나서지만 그것이 좀 험하고 고통스럽고 힘이 드는 길은 잘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 신학교 다닐 때 그런 사람을 빗대어 부르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거기에 괄호 열고 섬마을 교회 빼고 시골교회 빼고 개척교회 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늘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르게 하면 할수록 시험거리는 더 많아지고 힘든 일은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힘이 드는 일이든지 즐거운 일이든지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길이라면 언제라도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저것 다 살피고 이 생각 저 생각 다 하다가 보면 주님을 놓쳐 버리고 맙니다. 
달리기를 하는데 독일 사람들은 앞만 보며 달리고, 미국사람들은 뒤에 따라오는 자를 살피며 달리고, 일본사람들은 뒤를 따르는 자와 좌우를 살피며 달리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전후 좌우를 살피면서 자기를 추월하는 자의 발을 걸어서 넘어뜨리면서 달린다고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독일 사람들처럼 주님만 바라보고 달려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던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이 가시면 가고 주님이 서시면 서고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4.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본문 5절 말씀에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라고 했습니다.
시온산에 있는 십 사만 사천인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계시록 22:15절에는 그와 반대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성밖은 천국의 성밖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옥을 말합니다.

사실 거짓말하는 사람만 없어도 그 곳은 바로 천국일 것입니다.
사탄이 하는 거짓말에 속아 범죄하고 타락한 인생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정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라이어 라이어"라는 영화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아이의 아버지가 변호사였는데 거짓말을 너무나 잘했다고 합니다. 
거짓말쟁이 아버지에게 실망한 아들이 아버지가 하루라도 거짓말을 할 수 없게 해달하고 기도를 했는데 그것이 신비하게 실현되어서 하루동안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단 하루동안 거짓말을 못했는데도 갖가지 해프닝이 일어납니다. 
교통경찰이 불러 세우자 자진해서 그 동안 위반한 사실을 고백을 하고 
유능한 변호사였지만 거짓말을 못하니까 재판에서도 맥을 못 춥니다. 
그의 이러한 언어 생활은 그 가정을 이혼지경에까지 가지만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그는 조금씩 각성하게 되고 그 결과 다시 화목한 가정을 회복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면 별별 일들이 다 생길 것입니다.
그 동안 말만 가지고 했던 위선적인 것들이 다 들통이 나고 말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더 거짓말을 잘하고 더욱 엉터리라고 말들을 합니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가짜 꿀을 만드는 부모 때문에 교회를 멀리했었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주님을 찬양하는 것인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면서 할렐루야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 시간에 걸쳐서 십 사만 사천인의 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 십 사만 사천 인에 속한 사람임을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인을 받아 세상에 태어났고
구속하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소유 천국 백성이 되었으며
이 세상이 끝이 나면 주님과 함께 시온산에서 새 노래를 부를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승리의 노래 기쁨의 노래 크고 힘찬 노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노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신앙의 정절을 지킨 정결한 신부같은 모습이었고
어디든지 주님을 따르는 자였고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르는 노래(찬송)도 그런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십 사만 사천인 즉, 하나님의 택함 속에 내가 들어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크고 힘차게 기쁨으로 승리의 노래를 부르시고 아름답게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 노래를 부르기에 흠이 없는 깨끗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을 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